어느 에티오피아 6.25전사자 가족의 가슴아픈 이야기
지금부터 63년전,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의 Janmeda광장에서는,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돕기위해, 에티오피아 최강의 강뉴부대를 한국으로 파병하기위한 출정식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셀라시에황제는 “우리 에디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때까지 싸워라, 그렇지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Fight until you win, or die)”
에티오피아 불세출의 영웅, 셀라시에 황제가 세계평화를 위한 역사적인 연설을 하고있을 때, Desta와 Mekonen 형제는 다른 강뉴부대원들과 함께,
침략자를 응징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받치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Janmeda광장에서 출정식이 막 끝난 뒤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 속에 어딘엔가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14년전 자기의 조국 에티오피아가 아무 힘이 없이 이탈리아에게 침략당했을 때, 이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도 자기의 조국을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그때 너무나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뒤에 두고, 대한민국을 향하여 군함에 올랐습니다.
위의 사진은 그 때 Desta와 Mekonen 형제가
한반도로 가기위해 지부티에서 탔던 바로 그 군함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나라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의 조국 에티오피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생각하며, 인류평화를 지키기위해 스스로 지원하였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위해, 만류하는 가족을 뒤에 두고, 죽음이 기다리는 한반도로 향하였습니다.
황제근위병(청와대경호실)이라는 멋진 자리도 버리고, 죽음의 전선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왼쪽이 형 Desta, 오른쪽이 동생 Mekonen (당시21세)(왼쪽)
62년이 지난 바래진 사진 뒤에 있는, 암할릭어로 기록된 그들의 친필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열악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생전 처음겪는 눈이라는 물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신기하기도하였으나, 무척이나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Mekonen씨는 지금 소지하고있는 다 바래진 사진을 볼 때마다,
6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추위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치열한 전투에서 형 Desta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침략자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황제의 명령대로, 죽을지언정 항복하지않겠다고 맹세하던 형은, 포탄에 온몸은 걸레조각처럼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채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한반도를 향하였던 Desta라는 젊은이는 영원히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Desta 생전의 모습
1년이 지나 2차 강뉴부대가 도착하자, 1차 강뉴부대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갔습니다. 동생 Mekonen은 자기만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었습니다.
게다가 조국 에티오피아에 있던 형의 아내는 어린 자식 Dereje Desta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형의 가정은 풍지박살이 나서 공중분해가 되었고, 조카 Dereje Desta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혼자 돌아온 것이 너무나 마음아파서, 4차 강뉴부대로 다시 지원하였습니다.
형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지원하였으나, 막상 다시 와 보니, 휴전상태가 되어 형의 뒤를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자 이제는 가뭄이 7년간 계속되어서, 목축으로 살아가던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맹게스투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공산국가가 되자, 공산주의와 싸우기위해 군대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셀라시에 황제를 죽여 화장실에 매장하고,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스스로 지원했던 참전용사들은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되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게되었습니다.
다시 참전용사들은 공산주의를 몰아내기위해 뭉쳐서, 자기나라 군인과 싸우는 민주게릴라가 되었습니다.
이 내전에서 6.25참전용사들은, 북한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으로부터 결국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북한은 맹게스투 공산정부를 도와주었으나, 우리는 반정부세력인 6.25참전용사들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그 내전을 지휘했던 고급장교들은 모두 몰살당하거나, 가혹한 고문으로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내전에서 살아남은 6.25 참전용사들은 더욱 더 심한 핍박을 받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에티오피아, 그 에티오피아에서도, 더욱 가난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습니다.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저의 머리에도 온통 하얀 서리가 내릴 정도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분들도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이 까마득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2013년 6월 저는 또다시 에티오피아로 갔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던 저는 감사의 절을 하러 에티오피아로 갔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을 만났고,
그분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가난에 찌들고, 늙고 초라한 노인네들의 집에서는 괴상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저를 껴안고 울고있는 노인네에게서 역겨운 냄새가 저를 괴롭히지만,
그분들은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어떤 집에서는 화장실이 없어서 주위에 온통 악취가 풍기지만, 그분들은 우리의 보호자였습니다.
그분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변곡점에서, 온몸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셨던 분입니다.한국의 역사가 바뀌는 지점에서 피를 흘려 막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셨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을 짖밟히며 살아오신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한번도 입어보지못한 두루마기를 입고, 한번도 써보지못한 갓을 쓰고, 우리의 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동생 Mekonen씨를 만났습니다. 이제는 늙어서 볼품없는 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눈물 속에 우리의 과거가 있고, 그 분의 과거 속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만났습니다.
저는 Mekonen씨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Mekonen씨도 울었습니다.
Mekonen씨의 아들도 울었습니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신종섭 선교사님도 울었고,
가이드로 우리를 인도하던 에프렘, 아크릴루도 울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가족이 풍지박살나고, 고아가 된 조카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700비르(4만-5만원)가 든 봉투를 하나 건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우리 때문에 고아로 자라난 Dereje Desta씨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가정이 풍지박살이 나고, 고아가 되어 평생을 짖밟히며 살아온 Dereje Desta씨의 모습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모든 인생이 짖밟혔지만, 저에게서 “감사하다, 미안하다”는 인사를 받고,
그래도 보람의 웃음을 웃어주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저는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원망하던 그 아버지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세월이 흘러 “자랑스럽다”고 하십니다.
큰나큰 고통도 세월이 지나면 변질되는가 봅니다.
그리고 이 분의 가계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그에게 아들,딸을 넷을 두었더군요.
그리고 다른 6.25전사자의 아들,딸들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Dereje Desta씨에 관해서만 조사하였을 뿐, 다른 전사자자녀들에 관하여서는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못하는 말못할 사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세히 알지못해도, 모두가 우리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You've got too much pain from The Korean War. All I can do is give you painkiller.” 번역하자면, “당신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진통제를 줄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진통제 몇알씩 나눠드렸습니다.
이 분들은 직접 우리를 위해 싸우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분들 앞에서 큰 절을 올렸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고통의 원인과 결과, 고통을 당한 자와 혜택을 입은 자와의 관계로, 저는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맨 앞에 계시던 Etaferaw Tamirat 여사도 고개를 숙여 절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서 달라고 요청하자, 아버지의 비석을 찾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왜 아버지 비석의 위치도 모를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을 위해 죽었다고해서 자기를 찾아주는 한국사람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비석을 보고 싶지도 않고, 위치를 알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한반도 평화의 영웅들의 비석이 그 자녀들에게는 단지 돌조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Getachew Assfaw씨는 이제 아버지를 용서하고 비석 앞에 섰습니다.
Abreham Desta씨도 아버지를 용서하며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Tegegn Mulatu씨도 이제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Sinkinesh Wubete 여사도 서러움을 잊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Mamite Hunde 여사도 아픔을 참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Birtukan Lemma 여사도 과거를 떨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Etaferaw Tamirat 여사도 서러움을 떨치고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섰습니다.
저는 62년전 셀라시에 황제가 출정식을 하던 Jenmeda 광장을 가 보았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시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의 시작이 되었던 곳을 가 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Jenmeda광장에는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을 지켜준 셀라시에 황제와, 100전 100승이 아니라 253전 253승 무패의 강뉴부대 용사들은 보이지않았지만, 그 분들의 희생의 댓가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온 제가 감히 그곳에 섰습니다.
이곳 Jenmeda광장에서 출정식을 하면서, “침략자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이기든지, 죽든지 선택하라”고 외치던, 세계평화의 영웅, 셀라시에 황제가 떠난 자리에는, 누더기를 입은 꼬마들이 축구공을 차면서 놀고 있었고, 하늘에는 무심한 구름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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