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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그 애환의 역사

白 泉 2016. 1. 26. 09:09

쌀, 그 애환의 역사.

저녁식사가 끝났을 때,

아내는

근심스로운 얼굴로 남편에게 말했다.

‘옆집에서 또 쌀독긁는 소리가 나네요.’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한다.

‘거참, 야단났구먼.’

1950년대,

아직 이땅에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모두가 단독주택에 살았다.

울타리도 제대로 없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네는

그래서

옆집의 수저가 몇벌인지 훤히 알고 지냈다.

그러니

쌀독긁는 소리가 이웃까지 들리는 것이다.

그때

모든집은 재래식 부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바닥은 굳은 흙이었다.

그리고

부엌의 한쪽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쌀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독에 쌀을 채우고

작은 바가지로 끼니때마다

쌀을 퍼내어 밥을 지었다.

거의 모든집이

그렇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쌀독을 긁는다는 것은

쌀이 바닥나 바가지로

그 바닥을 긁는다는 뜻인데,

쉽게말해

그집 식량-쌀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다음

끼니가 없으니 굶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쌀독긁는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간식이나 주전부리가 없던시절

오직 먹을수 있는건 밥밖에 없었으며

그만큼

쌀-식량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때의 밥사발은

지금의 세배정도 더 컸다.

라면도 햄버거도 없던 시절이다.

밥이 주식이었고 그밥은 쌀로 지었다.

늦가을이 되면,

, 겨울김장, 연탄의 준비가 필수적 이었다.

춥고

긴 겨울을 나기위해

이 세가지는 생명선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모든 주부들은

이 세가지만 장만하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고 걱정근심이 없었다.

특히

쌀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단순한 주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쌀은 늘 부족했고 비쌌다.

쌀은

벼의 왕겨와 겨층을 벗겨내어

먹을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다.

쌀미자(米)를 보면

八十八로 조합돼 있으며

심어서

먹기까지 사람손이 여든여덟번

간다고 해서

그 수고로움을 짐작케 한다.

그만큼

재배하기 어려운 작물이기도 하다.

벼(禾)는

외떡잎 실물이며

화본과의 한해살이다.

동인도가 원산지이며

벼의 열매를 찧은 것이 쌀이고

전세게 인구의 40%가 주식으로 먹고 있다.

쌀은

이미 일천여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으며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식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 이전은

피, 기장, 조, 보리, 밀등의

잡곡이 주식이었으며

조선조 이후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잡곡을 앞질러 주식이 되었다.

그러나

쌀은 언제나 절대량이 부족했다.

1950년대의

심각한 식량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궁기를 알아야 한다.

춘궁기(春窮期)는,

지난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

농가생활에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를 이르는 말이며

보리고개로 유명하다.

매년

보리고개가 되면 절박하고

참담한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그중 하나가 절량농가(絶糧農家)다.

농사짓는집에

먹을 양식이 떨어졌다는 뜻이며

초근목피(草根木皮)는

풀뿌리나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맛이나

영양가가 없는 거친음식을 의미한다.

‘초근목피로 근근히 연명하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다.’ 라는

말의 유래가 그러하다.

그만큼 식량사정이 어려웠고

실제로

춘궁기에는 굶는사람들이 많았으며

심한 경우 굶어죽는 사람도 있었다.

6.25전쟁때

나는

피란지인 시골에서 춘궁기를 겪었으며

절량농가에서 초근목피도 먹어봤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난후,

나혼자 먼저

집을 둘러보기 위해 인천에 갔으며

저녁때 아버지 친구집을 찾았다.

그댁에서

정말 여러달만에 쌀밥을 먹었다.

밥이,

그 부드러운 쌀밥이

식도를타고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지않고 있으며

쌀한톨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있어

정말

쌀은 주식이상의 것이었다.

1963년 보리에 이삭이 팬후,

많은비가 내리는 바람에

평균수확량의 70%만 생산됐다.

농촌, 도시할것없이

식량사정은 크게 악화됐다.

이제 벼의 품종개량은

기아선상에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당시

재배되던 자포니카 품종은

키가커서 잘 쓰러지고

도열병에도 약했으며 수확량도 적었다.

벼육종

전문가인 허문희 서울대 교수는

1964년부터 2년간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벼품종 실험을 거듭했다.

1967년 새품종인

IR667을 수원 농진청으로 공수,

발이 푹푹빠지는 수렁논에 심었다.

허문희 서울대 교수

여름내내 관찰한후

이 품종에서 선발한 종자를

원두막옆의 자투리논에 심었다.

7월이 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파리들이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고개를 든 것이다.

8월 예비량 조사에서

10아르당 634kg가 나왔다.

그때

농가의 평균수량은 350kg 였다.

1972년

비로서 쌀 생산량이

처음으로 3000만석을 돌파했다.

광복전에는

남북한을 합해도 2500만석을 넘지못했던

벼 생산량이다.

단보당 생산량이

거의 두배에 이른 IR667은

통일벼’ 로 명명되었으며,

비로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건

대한민국을 살린 기적의 볍씨였다.

1977년 벼품종개발에 전력투구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주곡자립달성’ 이라는

감격적인 기념 휘호를 쓸수있었다.

북한의

사회주의가 사실상 무너진 것은,

식량배급제’를 실시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쌀은 공산주의다’ 라는 구호까지 외쳤지만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치와 먹는문제는

그렇게 예민하고 밀접하다.

우리정부도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과 가격안정을 위해

추곡수매제’를 실시했다.

매년 가을,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농민들로부터 일정량의 쌀을 사 들였으며

수매량과 수매가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정부가 결정했다.

1973년부터는

곡가의 안정을 위해

수매가격보다 판매가격이 낮은

이중곡가 제도가 실시되기도 했다.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것이다.

이때 발생한 적자가

양특적자-양곡관리특별회계의 적자였으며

발생원인은

쌀과 보리에 대한 수매에서 생기는

적자와 관리비용 이었다.

이차액-적자는

그대로 세금으로 보전되었으며

쌀은

그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아직

쌀은 시장(市場)밖의 온실에 있었다.

금년 쌀 농사는

역대최고의 풍작을 기록했으며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10아르당 542kg로

지난해 보다 4.2% 증가한

432만 7000톤을 생산했다.

이미 정부창고에

쌓여있는 쌀재고량은 136만톤이며

보관비용만도 연간

1760억원이 들어가고 있다.

금년의 풍작과 쌀 직불금을 더하면

앞으로

2조원대의 재정이 투입될 전망이다.

쌀 재고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쌀소비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지난 10년간

국민1인당

쌀 소비량은 17.4%나 줄었다.

반면

생산량 감소는

그 절반이 안되는 7.5%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 더해

FTA체결로 인한 농가패해를 보전하기위해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쌀직불금제도를 도입한것도

쌀생산이 늘어난 원인이 된다.

정부가

지난 10년동안 농가게 지불한

각종직불금은 10조원에 달한다.

특히 80kg 당

목표가격이 18만 8000원이며

고정직불금이

1헥타르당 100만원 이기 때문에

농민들이 논 농사에 매달리는 원인이

제공된 측면이 크다고 할수 있다.

쌀농사를 줄이고

밭농사를 유도하는 정책에서 실패한 것이다.

얼마전

한 지역농민들이 트럭에 벼를싣고와서

군청앞에 야적해놓고 시위를 했다.

작년보다

쌀값이 7-8% 하락한것에 대한 항의와

생산량을 정부가 구매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벼를

땅바닥에 쏟아붓는 행패까지 있었다.

오래동안 각종 특혜가

몸에밴 농민들의 생떼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모두는

냉정한 머리로 생각해 봐야한다.

배추농사를 짓는 농민이

가뭄 때문에 배추가 자라지 않아

큰 손해를 입었거나,

농사는 잘 되었지만 과잉공급으로

값이 떨어져 큰 손해를 입는 경우

정부에 대해 손해를 물어내라거나

배추를 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책임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농작물인 쌀만은

예외여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때

쌀은 국민의 주식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각종 특혜를 받은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지금은 식량이 부족한 시대도 아니고

쌀이 남아도는 시대다.

계속

전과같은 특혜를 누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동안 퍼부은 10조원은

우리들의 세금이 아닌가.

쌀문제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경위에는

농협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소비량이 급속히 줄었다면,

이미 영농지도가

합리적으로 이루어 졌어야 하며

대체작물의

재배와 판로까지 연구되었어야 옳다.

오늘날 거대해진

농협은 농사지도 보다는

금융업에 매달리고 있다.

직무유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쌀문제,

농민의 문제를 정책차원에서

그 근본부터 개선하고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농협에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농협이 전리품으로 전락,

비전문가의

낙하산 인사가 오늘의 농협을 만든

악의근원 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쌀농사에 대한

정책적 개혁과 그 실행은

변함없이 농협의몫이다.

소비가 되는 대체작물을 정하고

재배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물론

판로까지 확보 해야 하는 작업이

농협에서

이루어져야 쌀문제가 해결될수 있다.

농민 한사람 한사람이

개인적으로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쌀이 아무리 국민의 주식이고

국가 식량의 기본이라고 해도

이제는 시장에 내놔야 한다.

지금

이미 쌀만먹는 시대는 아니다.

천지에

먹을거리가 널려있는 시대가 아닌가.

쌀도 농민이

농사짓는 작물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특혜를 거두어 들이는게

쌀이

경쟁력을 가지는 올바른 길이다.

차별화된 쌀,

특징이 있는쌀,

수출까지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쌀을 재배하지 않고는

살아남을수가 없다.

이미

일본은 이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또 하나는

지금은 사람이 쌀농사를 짓지않고

기계가 농사짓는 기계영농시대다.

그래서 더더욱

시장경제의 틀에 들어가야 한다.

길게보면

쌀을 시장에 내 놓는 것이

오히려

쌀이 사는길인 것이다.

경쟁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기 때문이다.

국가적 으로도

이제는 쌀에서 해방될때가 됐다.

쌀은 지금도

중요한 우리들의 주식이지만

농산품의 한가지일 뿐이다.

다른

농작물들과 달라야할 이유가 없다.

음식귀한줄 모르면 반드시 고생하게 된다.

-법정.

by/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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