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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의 힘

白 泉 2016. 4. 20. 09:14

종이책 의 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대형서점 교보문고의 캐치프레이즈다.

책을 만든 것은 사람이며,

그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는 진실이다.

사람은 교육-학습을 받지못하면

본능대로 살게된다.

모든 축생들의 동물적인 삶이 그러하다.

때문에

교육이 없거나 잘못받은 사람들은

짐승같은놈이 되던지

짐승만도 못한놈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모든 엽기적인 범죄의 범인들이 그들이다.

본능적 인간을

윤리와 도덕을 갖춘 인격으로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육-학습 이다.

본능적인 인간을 교육하는 방편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그 방법을

구현하는 것은 언제나 종이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각급학교의 교과서다.

그래서

종이가 곧 문명이라는 말을 하게되는 것이며

종이의 소멸이

문명의 소멸로 이어질수 있다는 예견은

역사적인 설들력을 가진다.

종이책은

인류문화의 유산이기 때문에

지금도,

앞으로도 인간과 함께있는 것이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나 되지만,

유인원중 뛰어난 종(種)이 나무에서 내려와

두발로 선 것은 겨우 700만년 전이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수 아프리카누스-

아프리카 동쪽의 원숭이가 그들이다.

오직

먹을 것을 찾아 헤매기를 수백만년,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인

크로마뇽인이 나타 난 것은 불과 4만년전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것도 그때쯤이다.

인류학자들은

계속

서로다른 주장으로 다투고 있지만

크로마뇽인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지각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들은

가족의 무덤에 꽃을 던져 넣었으며

동굴속에 놀라운 벽화를 그린후

손바닥 도장을 찍은 것을 보면

이미

개인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짐승의 가죽을 쓰고 다닌 것이 아니라

속옷, 겉옷, 외투까지 바늘로 지어 입었으며

낚시바늘을 만들어 고기를 잡았다.

이렇게

놀라운 인간적 능력을 가진 그들도

아직은 글자가 없었다.

그들을 더 잘 알기위해

뼈조각 하나, 치아하나, 화석 한조각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글자가 없던시대,

기록이 없던 시대를 고고학적 으로는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석기시대-청동기시대가 여기에 해당되며

인간생활을 알 수 있는

문헌적 자료가 전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글자그대로 역사이전의 암흑기인 것이다.

여기에 비해 역사시대는,

선사시대 이후 인류생활에 관한 문헌자료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는 시대다.

비로서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개명천지가 된 것이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겨우 5천여년 전이다.

BC3000년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고대 바빌로니아 남부지역에서

인류최초의 문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그것을 ‘수메르문화’ 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그림으로된

기초적인 글자들을 발명했는데

그것이 더 발전된게

바로 쐐기글자-설형문자다.

진흙을 이겨만든 점토판에

날카로운 금속 펜으로 찍어서 써나간 글자다.

이 점토판의 기록으로

우르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실존인물임도 알게되었다.

이후 1세기까지

중동지역에서 쓰여진 수메르의 설형문자가

역사시대를 연 것이다.

수메르문화는 샘족에게 흡수된다.

점토판에 찍힌

쐐기글자가 최초의 책 이라면,

다음이 파피루스이며

이어 양피지가 등장하며

결국은

중국에서 시작된 종이책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기를 발명한 구텐베르그가

최초의 42행 성서를

인쇄, 발행한 것이 1452년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조상들은 구텐베르그보다

8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책 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직지심경’ 이다.

책에 관한한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며

한글이라는 글자는 세계어로 써도 손색이 없는

과학적 체계를 가진글자다.

총,균,쇠를 써서

유명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세계가 공통의 글자를 가진다면

그건 한글이라고 했다.

한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수 있는

과학적인 글자라는게 그 이유다.

책은,

읽어야 책이다.

읽지않고 덮어둔 책은 미생물일 뿐이다.

인류는 읽기를 통해 학습되고 발전해 왔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모든책들은

인생의 온갖 심오한 문제들에 대해

그 대답을 시도한 놀라운 기록들이다.

책이 있음으로

인류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으며

인간은

무지몽매에서 구원받을수 있었다.

책과 읽기는

그렇게

중요한 인류의 문화적 유산이며

고귀한 행위인 것이다.

홈쇼핑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물건을 사는 재미는 거의 없다.

시장에 나가 눈으로 보며,

주인몰래 만져도 보고

이것저것

비교도 하면서 고르는 재미는 없다.

그래도

책은 아직까지는

고르는 재미가 남아있다.

아무리

간접적인 광고나 책소개라 해도

그중 하나를

골라내는 재미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문,

주문한 책이 집에 도착할때까지의

기다림은 사실 설레임 이기도 하다.

어떤 책이 올것인가.

내가 원했던 내용이 있는 책일까.

번역서인 경우

그 번역은 어느수준일까

잘못된 번역서는 읽을수가 없다.

낚시에

조삼락(釣三樂)이라는게 있다.

기다리는 재미,

놓치는 재미,

잡는재미가 그것이다.

기다림도 즐거움이 된다는 얘기인데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책이 도착한다.

포장을 열고 책들을 꺼낸다.

먼저 책을 손에들고

그 질량-무게를 느끼며 흐믓해 한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며 활자체를 확인하고

종이와 잉크의 냄새를 맡아본다.

다음은

책 표지의 디자인을 구경한다.

이렇게

책을 외형적으로 탐색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준비운동같은 것이다.

다음이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된

저자에 대해 알아본다.

책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저자의 ‘서문’ 이다.

서문을 잘 읽고 소화해야

그 책을 제대로 읽을수 있다.

어떤책은 서문만 읽고

그대로

서가에 끼워두는 경우도 있다.

서문은 그렇게 중요하다.

다음이 목차,

목차는 전체를 한번 훑어보고

다음은

한 항목씩 자세히 읽어봐야 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것인지,

아니면

몇 개의 항목만 읽을것인지를 결정할수 있다.

어떤책은

전부를 정독해야 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으며

어떤책은

중요항목만 읽어도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건

그 내용이 이미읽은 다른책들과

중복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렇게 된다.

말하자면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다.

대표적 산문인 소설이나,

언어의 함축인 시,

그리고

평론집이나 전문분야 책들은

그 읽는 자세와 방법이 같을수가 없다.

재미있는 통속소설과 종교서적의 구분이

좋은예가 될 것이다.

수필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수 있지만,

순수이성비판’을 그렇게 읽을수는 없다.

자본론’을

재미있게 읽은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어렵고

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행이지만

그 책을 읽고 이해해야

사회주의가

붕괴된 학문적 이유를 알 수 있다.

불경이나 성경을

만화처럼 읽어서도 안된다.

그 책들의 심오한 가르침은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된 사람들 에게만

이해되고 깨달음에 이를수 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고전들은

가장 순수한 인간들이 남긴 가르침이다.

싯달타와 예수, 공맹의 가르침이

지금도 존중되는 것은

그들 말씀안에 본능을 몰아 내고

극복할수 있는 생수와 같은

가르침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야

비로서 도달할수 있는

놀라운 정신의 세계인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거의 모두가

보기-일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별은

한번 흘낏보는 것이다.

계속 바뀌는 영상은

일별하는 것 만으로도 쫓아갈수가 없을 정도다.

이제는

하나의 모니터에 여러개의 영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하이테크닉의 시대가됐다.

영상들을 속도감있게 일별하면

축적되는 기본적 자료가 부족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냥 보여주는

영상들의 ‘손님’ 일 뿐이다.

그래서

머리가 비어가는-동공현상이 나타난다.

다 큰 애들이

세월호에서 안타까운 떼죽음을 당한게

위험’을 감지하는

생각’ 이 부족 했기 때문이다.

‘지시’ 만 기다리도록 사육된 것이다.

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인간기능이지만

보기만 으로는 균형된 삶을 살 수 없다.

동시에

듣기가 중요한것처럼 ‘읽기’ 도 중요하다.

읽음으로서,

비로서 사고-생각을 하게되고

분별과 판단으로 이어질수 있다.

보기,

듣기,

읽기는

그래서 균형을 요구한다.

어느 하나만 으로는 원만한,

전인적인 인간이 될수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을 여행해 봤고

어떤 나라는 여러번 가 보기도 했다.

프랑스와 빠리,

그들의 높은 문화와 사람들을 알기위해

중산층 프랑스인 가정에

한달을 민박, 숙식을 같이하며 그들을 관찰해봤다.

런던에서 차를빌려,

운전석이 오른쪽인 차를 직접운전하면서

도로와 땅으로

그들의 나라를 오래동안 민박하면서 여행해 봤다.

선진국들의

커다란 공통점은 책이었다.

가정에도 책이 많았고

그게 어떤종류의 대합실이든

책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독서는 일상이었다.

그들이 선진국인 것은

결국

아는게 더 많다는게 이유다.

알면

더 효율적이 되고 낭비를 줄일수 있다.

그들이

우리보다 단위시간당 생산성이

크게 앞서는 것이 그 이유다.

우리의 모든 대합실에는

커다란 TV가 높이 걸려있으며

모두가 교주앞의 신도들처럼

경건하게, 집중해서 연속극을 시청한다.

그러니

책읽는 사람을 찾아볼수가 없는 것이다.

한창 일할 아침시간에

드라마를 방영하는게 우리나라다.

읽지않고

보기만 해서는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선진국들은 보기만 하는게 아니라

계속 읽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은 책이다.

아무리 출판계가 불황이라 해도,

우리나라는

한해 4만종의 책이 출판되고 있는 문화국이다.

책이 없는게 아니라

책을 읽지않는게 문제다.

종이책을 손에 들었을 때 느끼는 무게는

그 자체가 문화다.

밑줄을 쳐가며 다시 읽는 것은

지식이 축적되는 순간들이다.

책은

계속 질문하고 또 방향을 암시해 준다.

페이지의 여백에 메모하는 것은

그 부분을 자료로 쓰겠다는 표시다.

그렇게 책은

은밀히,

분명하게,

끊임없이 사람을 만들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향상되고 발전할수 밖에없다.

지금처럼 책을 읽지않으면

우리는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더 높이 비약할수 있다.

학교공부가

입시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에

책읽기는 더욱 요청된다.

책이 진정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동헌에서 퇴청한

사또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사랑에서 서책을 읽고 있다.

그때 당돌한 아전의 어린 아들이

살금살금 다가와서 수작을건다.

‘원님, 지금 뭐 하세요.’

덕이있는

사또는 나무라지 않고 대답한다.

‘보면 모르느냐, 책을 읽고있지 않느냐.’

당돌한 놈이 물러서지 않는다.

‘책안에 뭐가 있는데요.’

사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책안에는 모든게 다 있단다.’

‘밥도 있나요.’

‘암, 밥도 있지.’

‘돈도 있나요.’

‘돈도 있지.’

‘그럼.. 옷도 있나요.’

그때 사또는

당돌한놈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대답한다.

‘얘야,

책속에는 정말 모든게 다 있단다.

그러니

너도 책을 읽어야 하느니라.‘

책은 스승이자 친구이며

일생의 동반자 이기도 하다.

by/yoro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