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Good Death)이란?
좋은 죽음(Good Death)이란? |
장모님 별세하시며, 양가 부모님이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괜스레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은 건 말 할 나위도 없다. 늘 그립다. 내 아내도 나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장모님은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병원 직원들은 친절했다. 다만 남이므로 불친절하지 않은 친절함이었다. 나는 의사이므로 그 느낌을 안다. 직업 상의 친절함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가족 사이의 살가움과는 전혀 다르다.
그게 싫었다면, 사위인 내가 모시거나 아들들이 모셨어야했는데, 내가 모실 수 있었나? 병원에 매일 방문하며 아내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나는 강권하지 못했다. 핑계는 많다. 당신의 세 아들들이 있는데.. 하여간 요양병원에 계시던 장모님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당신은 “나, 집에 가고 싶다. 집 침대에 눕고 싶다'는 말씀을 우리 두 사람이 갈 때마다 하셨다. 음,, 나는 불효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자녀들 중 아무도(사위인 나를 포함해서)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여 실행할 마음이 없었다. 아무도 장모님을 집에 모시려 하지 않았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진해지면 본인의 원하는 바가 자식들에 전해지지 않는다. 자식들이 부모의 의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요양병원이 현대판 고려장의 장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글펐다. 장모님이 처한 상황과 나 자신의 처신에 관해서, 둘 다 모두.
장모님은 요양병원에 약 한 달 머물다 돌아가셨다. 숙환인 당뇨 합병증 때문이었다. 요양병원은 환자를 케어할 의지와 시설이 모두 부족했다. 가족들에게 일종의 손쉬운 죽음의 관리 장소였다. 시골 노인들도 그런 사실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절대로 요양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거부한단다.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다더라.” 그래도 자식들은 어찌할 바가 없으므로, 부모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신다(보낸다).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다가, 이틀에 한번 들리다가 한달에 두번 들리다가, 나중에는 전화만 한다. “안 좋으면 연락해주십시오.”
장모님의 임종을 경험하며, 한국의 요양병원은 평안한 죽음의 장소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요양병원은 죽음의 수용소인 듯 보였다. 무섭고 삭막한 곳이었다. 만약 내가 의식이 남아있는 채로 요양병원에 입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나라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시간을 두고 우리의 죽음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똑똑한 영국인들이 평안한 죽음에 대해 조사해두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앞서서 노령화와 노령화의 종국인 노인들의 수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죽음의 고통도 충분히 경험했다. 불합리한 죽음의 문제점들을 절감한 영국 정부가 죽음 전문 학자들에게 평안한 죽음을 정의 내리도록 했단다. 그리하여 2008년 영국 학자들이 좋은 죽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in the place of one’s choosing),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with family and friends nearby), 존엄을 유지한 채(with dignity), 고통 없이(free of pain), 죽는 것이 좋은 죽음(Good Death)이다.”
-생애말기 치료전략(The End of Life Care Strategy), 영국 2008년-
바꿔 말하자면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존엄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이다. 곰곰 생각해보자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며 의미심장한 개념들이다. 나는 영국인들이 내린 좋은 죽음의 정의에 공감한다. 다만 그렇게 죽기위해서 몇가지 준비해야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돈이다. 둘째는 진통제다. 셋째는 평안한 죽음을 위한 수단이다. 넷째는 평안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용인이다. 다섯째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으려는 본인의 의지다.
나는 그리고 내 아내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시기'가 오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다. 나와 아내는 확고한 의지로, 정신이 명료한 상태에서 죽음을 직시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나로선 평안한 죽음을 위해 필요한 약품과 방법을 마련해둘 생각이다.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족 내에서 합의가 된다면 내 아이들 앞에서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 싶다. 과연 그리 될려나? 나는 실현 가능한 것만 원하므로 아마도 그리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