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길고
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1세대 철학자 김형석 교수를 잘 모르겠지만,
우리 때 만해도 <영원과 사랑의 대화>나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 가> 등
그의 책을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젊은 시절에는 그의 인생론
수필을 읽으며 성장했다. 놀라운 일은 벌써 96세가 되었음에도
그는 지금까지 여전히 현역처럼 강연하고 다닌다. 은퇴하셨지만
그처럼 활동하시는 또 한 분이 더 있다. 바로 이어령 교수다.
그는 20대에 벌써 신문사 논설위원을 했고 30대에 교수를
그리고 50대에 장관까지 했었다. 그는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어느 일간지에 몇 년 동안 연재했던 시와 우리말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아직도 내게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사람과 버금가는 또 한 사람인 김동길 교수가 있지만,
나는 먼저 두 분을 통해 공통분모를 발견하며 내 자신이 그 나이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봤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두 분 다
아직도 왕성하게 현역같이 활동하지만 그들에게도 고독은 피할 수 없는 뇌관이었다.
김형석 교수는 사별한지 11년 동안 혼자 지내면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혼자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전엔 멀리 해외에 가면
몇 일만 지나도 빨리 돌아갔으면 했는데 이젠 혼자라 그런지 돌아가고픈
생각이 없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동네에 아들이 살고 있음에도
제 3자처럼 ‘너는 너고 나는 나로구나’로만 느껴진다고 하니
고독은 노 철학자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요단강이었다.
본인도 오래 전에 <고독이라는 병> 수필집에서 ‘고독은 창조의 원천’이라고
말했었지만, 막상 나이 들고 보니 고독은 창조는커녕 생리적 외로움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길게만
느껴지며 살고 있다. 그 고독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 더더욱 죽음이라는
원초적 두려움으로 탈바꿈되면서, 인간은 결국 홀로 가야한다는 숙명 앞에서
그도 믿고 왔던 모든 것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자, 깊이 생각해야하는
골치 아픈 일은 질색이고 미숙한 자처럼 기막힌 우연을 바라보며
인생의 계획도 멀리 내다보고 짤 수가 없어 뭐든지 단기적으로 1,2년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수없이 고민해봤다.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고 아니 죽음을
이기는 삶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
산다면, 나이가 든 연약한 인간이지만 모든 철학자들의 고민이었고
모든 인간의 영원한 과제였던 죽음이라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자신과 소유를 위해 살았던 가치들은 다 없어지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이 보람으로 남더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 이웃, 사회라는 것이 이제야 새삼
이렇게 좋고 아름다운 축복이 됨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자기 인생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젊은 시절이 아니라 60대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의외로 너무 단순했다.
젊을 때는 생각이 얕기에 인생의 가치도 모르고 행복이 뭔지도 몰랐지만,
60정도 되어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 ‘사랑이 있는 고생’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지론이다.
젊었을 땐 앞만 보고 달리느라 이웃은커녕 사랑하는 사람조차
도무지 눈에 안 들어왔다. 이제 보니 그들을 통해 인생이 성숙할 기회가
되었고 그들 속에 내 영혼의 가치뿐 아니라 내 인생의 행복지수가
매겨지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어찌하나. 인생은 어차피 후회와 반성의 연속이기에 외로움도 고독도
사랑스러워 어느 덧 내 등에 파고들어 꺼이꺼이 울며 밤을 보내다가
아침이 되면 또 새로운 소박한 꿈을 안고 먹고 만나고 놀다가 흩어지면
끝인 것이 인생이기에 그들에게 종교란 마지막 인생의 큰 성이 되었다.
김형석 교수는 한 때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지만,
결국 회의에 빠진 뒤 도스토옙스키 여러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로 돌아왔다.
이어령 교수도 원래 기독교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딸의 시력상실과 회복 또 죽음을 통해 마음을 열게 되면서
지성에서 영성의 사람이 되었다.
최근 들어 지성인들이 만년에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은 절대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그들 뿐 아니라 모두가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어서라도 믿는다는 요청적 유신론까지 생겨난 것이다.
끝없는 인간의 한계와 무력감은 일치감치 자아의 바벨탑을 내려놓게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은 영혼의 본능에 대한 갈망은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었기에
신을 의지했던 것이다.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별은 북극성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각자의 별은 시간의 영원성 앞에 북극성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하루는 길고 1년은 빨리 가는 지금, 자아의 인공위성이 필요하다.
그 별은 유용한 정보보다는 새벽까지 빛을 내려고
오늘도 설렘 속에서 나를 위하여 쏘아 보낸다.
<글 그림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