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자유게시방

애국가에 대하여

白 泉 2016. 1. 5. 08:49

                         

                                                   ▲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安益泰) 先生초상화 ...


★ 애국가에 대하여 ★

애국가(愛國歌)는 말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의미 하지요
우리나라 애국가는 별다른 이름없이 그냥 애국가(愛國歌)라 부르는데
다른나라들은 국가(國歌)에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어요
예를 들면
미국은 "성조기여 영원하라" 일본은 "기미가요" 중국은 "의용군진행곡" 등등이지요

우리나라가 애국가를 처음 사용한것은 조선말기 부터라고 하지요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가지 애국가의 가사가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어떤 곡조로 불렀는가는 명확하지 않아요
다만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서구식 군악대를 조직하여 1902년에 처음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주요 행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노래말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을 전후하여
조국애와 충성심 그리고 자주의식을 북돋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이 노래말에 붙여진 곡조는 안타깝게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었지요

당시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안익태(安益泰) 선생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우리나라 애국가를 남의 나라 곡에붙여 부르는것을 수치스럽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애국가를 반드시 내손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해 오다
1936년 드디어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게 되었지요
정말 대단하고 장한 일이었지요
 
당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 곡을 대한만국 애국가로 정식 채택하여 사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이는 해외에서만 퍼져 나갔을뿐 국내에서는 광복이후 정부수립때까지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애국가를 맞춰 부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현재의 노래말과 함께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지요
이로 인해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애창하기 시작하였지요

이때부터 애국가가 국가로 공식화 되면서 1950년대부터는 대한뉴스 등에 담겨
적극적으로 홍보가 이루어 졌어요
그리고「국기게양 및 애국가 제창시의 예의에 관한 지시(1966)」등 각종 지침ㆍ지시
등에 의해 국민의례로 점차 자리매김 되었지요 

당시「국기게양 및 애국가 제창시의 예의에 관한 지시」를 보면
"국기에 대한 경례 및 애국가 제창이 진행되고 있을때는 단정한 자세로 예를 표하고
그 주위를 통과하는 모든사람과 차량도 일단 정지하여 예를 표하도록 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1970년대 초에는 영화관에서 본 영화 상영전에 애국가가 상영되기 시작하였으며
1976년부터는 정부기관 등에서 국기강하식을 거행하였지요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주요 방송국에서 국기강하식에 맞춰 애국가를 방송하였어요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중지되었으며 음악회와 같은 공연장의 애국가 상영도 이때

 

자율화 되었지요 한편 1984년에는 그간 지침 지시 등에 의해 시행되던 애국가 제창이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제적으로 명문화 되었어요

1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슬플때나 기쁠때나 우리 겨레와 운명을 같이해온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새롭게 되새겨야 하는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며 더 나아가 후손된 도리라는것을 알아야 하지요

그리하여 애국가 제창 및 연주 애국가를 부를때에는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애국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곡조를 변경하여 불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각종행사 등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는 경우에는 애국심과 국민적 단결심을 고취하는 의미에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4절까지 제창해야 한다 하네요
애국가는 모두 함께 부르는 경우에는 전주곡을 연주하지만
약식으로 국민의례만 행할때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시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연주만 하는경우도 있어요

또한 의전행사나 시상식 공연 등에서는 전주곡을 연주해서는 안되며
애국가가 연주될 때에는 반드시 일어서서 경청하는 것이 예의라 하는군요


우리 나라 국가인 애국가는 안익태(安益泰)(1906.12.5∼1965.9.16)선생이 작곡하였는데
안익태 선생은 평양(平壤) 출생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중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한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하지요

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서 주로 지휘법을 사사받고
1936년에는 몇년전 미국에서부터 준비해 오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하네요
이를 공로로 1957년 대한민국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1965년 9월16일에 작고하자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지요  
작품으로는 <애국가>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애! 강산의 의기논개>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하는군요

그리고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안창호 선생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것도 공인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작사미상으로 남아 있지요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절은
“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 ”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 선생을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니 고쳐서 부름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윤치호 선생이 "생각해온 적당한 구절이 있느냐"고 도산에게 되묻자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 선생이 매우 기뻐하며 찬성하였지요

이에 도산이 당시 교장인 윤치호 선생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설이 있어요

또한 4절 첫구절도 원래는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
였으나 1919년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개사한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하네요

아무튼
문헌상에는 윤치호 작사로 된것이 많이 남아 있으나
안창호 선생이 만들고 윤치호 선생이 작사한 것으로 발표된것이 많으므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심의는 없었지요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애국가는 다른나라와 달리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노래)가 되었지요
 
작곡자가 <애국가>의 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고
그 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즉 <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붙여 불리는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국사람인 자신이 직접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36년에 곡을 완성하였지요 
그리고 같은해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올림픽에서 최초로 불린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하네요
 
곡은 가장조(또는 사장조) 4분의 4박자로 되어 있으며
속도는 느리고 장중한 분위기의 악상을 가지고 있어요 
모두 16마디로 되어 있으며 4절의 가사로 된 유절형식과 a-b-c-d의 구조로된
가요 두토막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간결하면서도 장중한것이 특징인<애국가>는 사용용도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된다 하네요

피아노 반주로 된것이 원곡이고 
아무런 반주 없이 부르는 것과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것이 있지요 
반주가 있는경우에는 4마디의 전주가있고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경우에는 전주가 없어요 
작곡자는 이<애국가>를 주제로 하여 1936년 자신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을
작곡하였다 하는군요

애국가 가사의 전문을 보면
1절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 나라 萬歲
後斂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2절
南山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 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
(後斂)

3절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後斂)

4절
이 氣相과 이 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後斂)

여기서
애국가 1절에 나오는 하느님은 일반적인 의미의 하느님 이지요
즉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나라를 돌봐주시는 분으로 단군신화처럼  종교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하지요

그리고 기독교 등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은 하나라는 의미의 유일신을 이야기 하지요 
그냥 통칭적인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으로서의 하나님인 것이지요
그래서 애국가를 부를때 "하느님"이라고 해야지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된다 하는군요

물론 애국가를 작사 하신 윤치호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이 기독교 신자여서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작사 했으나 어느날부터인가 하느님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어요
그러나 일국의 애국가는 종교를 떠나 모든 국민이 어울리는 의미가 부여되야만 된다는
명분이 더 힘을 얻고 있는것이 사실이지요

또 애국가 2절가사 중의 '남산(南山)'이란 구절이 있어요
그런데 이 남산이란  의미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무척 많아요
어떤 사람은 서울의 남산을 의미하고 있는줄 알기도 하지요

어느 고장을 가나 '남산'은 많이 있지요
서울에만 남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곳 어느고장을 가도 남산은 많이 있어요
또 이 '남산'을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알고 계신 분도

    그러나 '남(南)'은 한자로 '남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 '남'은 '앞남(前南)'이었지요 즉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라 하는군요 '앞에 있는 산'이 곧 '남산'인 것이지요 그리고 '북'은 '뒤북(後北)'이었지요 그래서 '북망산(北邙山)'에 간다는 것은 '뒷산'의 묘지로 가는 것을 말함이지요 또 애국가의 가사 2절 중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가사가 나오지요 이 중에 '바람서리'를 간혹 '바람소리'로 잘못 알고있는 분들도 많아요 그러나 바람소리가 아니고 '바람서리'이지요 그 뜻은 '풍상(風箱)'이란 뜻인데 즉, '바람 풍(風), 서리 상(霜)'이지요 그러므로"풍상(바람서리)에도 변함없는 우리 기상일세'란 뜻이지요 또 3절가사에 보면 공활(空豁)이 나오는데 먼저 국어 사전을 통해 보면 공활(空豁)은 ‘공활하다’의 어근이지요 공활―하다(空豁―)[형용사] 텅 비고 너르다. 라고 나오지요 다시 말해서 하늘이 텅비고 너르다 라는 의미라 하네요 있지요 여기서 한문을 한번더 풀이해보자면 공(空) : 빌 공(空) 활(豁) : 뚫린 골 활(豁) 이지요 그러니까 비고 뚫려 있다는 의미 이지요 애국가 3절에 나오는 '가을 하늘 공활(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 는 바로 뒷 가사에 나오듯 "가을 하늘이 구름 한점 없이 넓고 파랗게 물들어 있다" 라는 말이라 하는군요 아무튼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과 작사자 윤치호 선생의 친일 문제가 대두되긴해도 우리 민족이 널리 부를수 있는 애국가를 만드신 분들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 동렬(일송) *- ★ 애국가 작사자는 현재 미상이지만 아래 두분이 만드셨다 하네요 ...

     

    ▲ 좌옹(佐翁)윤치호(尹致昊)先生 ...

     

    191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모습 ▲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先生 ...

     

 

 


 

'자유게시판 > 자유게시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長壽 하는 길   (0) 2016.01.06
99의 노예(奴隸)  (0) 2016.01.05
요실금 때문에 젖은 속옷  (0) 2016.01.04
2016년 병신년(丙申年)은 붉은 원숭이띠 해  (0) 2016.01.03
노부부의 기다림  (0) 2016.01.01